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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찬가

순수한 남자 2010. 10. 14. 09:54

이정희 찬가
번호 207289  글쓴이 초모룽마  조회 230  누리 117 (127-10, 9:10:1)  등록일 2010-10-14 00:52
대문 6


이정희 찬가
(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10-10-14)


1.

오늘 경향신문 2면, 드라마 <대물>이 모 여성정치인을 그리는 듯하다며 그의 대세론을 은근히 띄운다. 4면에는 북한의 3대 세습에 무비판적인 민노당, 더 정확히는 모 여성정치인에 대한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고 쓴다.

전자는 박근혜고 후자는 이정희다.

2.

갈데없이, 2012년은 이명박의 삽질과 제2 노무현의 싸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 모두가 노무현과 이명박을 제대로 겪어 본 후라서 그때쯤은 어느 쪽으로든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저쪽의 삽질만으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정권을 회복하려면 2012년에 제2의 노무현을 필요로 한다. 그는 노무현 자신이 그랬듯 뜻밖의 인물, 그러나 알아갈수록 감탄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노무현의 사람’이 아니라 ‘제2의 노무현’이어야 한다. 노무현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노무현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 있나?

많다. ‘제2 노무현’ 풍년이다. 아무한테나 갖다 이름붙이는 모양새다. 손학규에 따르면 심지어 김영춘도 제2 노무현이다.

하지만 진짜 제2의 노무현(이 될 사람)은 현재 이 사람뿐이다. 말이 그렇고 행동도 그러하다. 프로필, 정치방법론도 노무현과 같다. 꿈꾸는 사회도 세계관도 노무현과 비슷하다. 그는 이정희다.

이 글은 2012년 이정희의 가능성에 대해 토론의 판(즉, Why 이정희)을 한번 마련해보자는 목적으로 쓴 것이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 찬가이기도 하다.

3.

필자만 이정희를 눈여겨보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해가고 있다. 특히 제2의 노무현을 절실히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그렇다.

‘돋보이는 의정 활동’ 및 ‘같이 일 해보고 싶은’ 정치인 1위, 헌정사상 최연소 당 - 유력한 당은 아니지만 - 여성대표, 현장을 좋아하는 인권변호사 출신….

이런 프로필은 한 개도 갖기 힘든 게 작금의 정치판인데 그는 일 똑 부러지게 하고 젊디젊으며 게다가 (아니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애정까지 두루 갖춘 거다. 진짜로, 이런 정치인은 노무현 이후 처음이다.

이해찬은 일찌감치 그녀를 제대로 알아봤다. “나는 요즘 이 사람이 제일 좋더라.” 이해찬이 흥분한 이유는 제2의 노무현을 찾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1988년 당시의 노무현을 보는 것 같다. 2017년 대선 후보감이다.”

4.

하지만 이해찬의 평엔 결정적 흠이 하나 있다. 2년 후에는 절단이 나든 절단을 내든 결판 지어야 하는데 2017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하루가 급한데….

가카는 레임덕이다. ‘쥐20’으로 군기 잡아보려는 것도 ‘공정사회’를 꾸며내는 것도 박근혜하고 죽이 잘 맞는 척, 이재오가 구십 도로 고개 숙이는 것도 모두 이 레임덕의 다른 표현이다. 뒤집어 보면, 저쪽은 이미 차기를 준비하고 있다.

적어도 긴장하고 있다. 이쪽은 준비도 긴장도 없다. 얼마나 한심해 뵀으면 문성근이 거리로 치고 나왔을까.

정권을 되찾기 위해선 삽질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쪽에서 먼저 확신을 주어야 한다. 옳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 내지 믿음을 줘야 한단 말이다. 누구에게? 결국 판을 결정 낼 부동하는 사람들과 젊은 축들에게.

이들을 진보로 확고히 방향 틀게, 렬렬히 투표케 하기 위해서는 정치란 막연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아니라,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특히, 그들이 스스로 조직된 시민으로서 행동할 때 그리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확신을 담지해낼 매개자, 즉 인물이 필요하다.

대중은 항상 그들의 꿈을 대신 실현시켜줄 매개자를 찾는다. 머리 굳은 꼴통들을 떼어내면, 대중들은 가카의 삽질로부터 노무현의 길이 옳았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어떤 확신이 필요할 텐데 다음 대선에서는 그 확신은, 옳다고 느끼고 있는 노무현의 길을 확고히 걷는, 알아갈 때마다 그 사실을 번번이 깨닫게 해주는 인물로부터 나올 게 분명하다.

재미로, 손학규나 정동영 같은 사람이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아무 확신이 서지 않으니 시니컬한 대중들은 쭈뼛쭈뼛할 거다. 또 6백만 표차 꼴 난다.

(홍준표가 손학규의 등장에 ‘다음 대선에서 한나라당 어려워졌다’고 했다는데 이게 자기 놀리는 말인 줄도 모르고 요즘 지지율 올라간다며 표정관리까지 한다고 한다.)

손학규, 정동영과 함께라면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치의 주역 - 정당과 정치꾼의 들러리가 아니라 - 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다고 확신할 것인가?

필자가 보기엔 고향, 핵교, 교파만 다를 뿐이지 정치하는 방법, 세상 보는 눈 모두 손학규, 정동영, 가카 간에 큰 차이 없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할 이유가 없는 거다.

5.

자발적으로 나서서 낡은 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그 열정을 투사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는 인물, 젊고(단순히 나이만을 의미하지 않는), 역량 있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춘 인물이 있어야 한다.

감동을 주는 인물, 앞으로 2년의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 잠재능력이 폭발하는 것을 대중들이 놀랍고도 즐거운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우리가 발견해내야 하는 것은, 이정희의 가능성이다.

개인적 역량에 더하여 이명박에 대한 스탠스, 정권 되찾기와 야권통합, 참 민주주의와 평화 추구에 대한 일관성과 열정, 무엇보다 진정성을 이정희보다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는 정치인 있나?

좋든 싫든 이제 선거는 세대 간 싸움이 됐기 때문에 이정희의 이미지는 장점이 될지언정 단점은 아니다. 저쪽의 ‘닳고 닳은 인물’과 확연히 대비된다면 더 좋다.

저쪽에서 박근혜가 나왔다고 해보자. 70년대 향수 이미지는 2000년대의 젊고 역동적인 이미지로 극복해야 한다.

결정적인 것은, 그네는 정점에 오를 만큼 올랐고 이제 내려갈 일만, 우아한 이미지 깎이고 그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수첩실력이 제대로 드러날 일만 남았다는 거다. 누구 말대로, 대선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정희는 정확히 그네와 반대다. 그렇다면, 경쟁력 있다. 확신하지 못하고 귀찮아하는 사람들을 폭발시킨다면 말이다. 2012년에 정점에 오를 수 있다.

6.

이정희가 최근 2012년 총선에 관악을(이해찬의 옛 지역구) 출마의사를 밝혔다. 그때 이미 범야권 후보가 되어 있어야 한다. 대선까지 바라봐야 한다.

정권 되찾는 방법은 단 하나다. “야, 뭉쳐.” 뭉치지 않으면 공멸이므로 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 자, 그 누가 됐건 가카에 질린 대중들의 강한 압력을 버텨내지 못할 거다(그래서 문성근의 도전은 성공확률이 높다).

분명한 것은, 뭉치는 과정이 혼란스럽고 힘들 거라는 점이다. 하지만, 소년이 전사로 거듭나기 위해선 어렵고도 고통스런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듯이, 새 리더십도 “낡은 방식의 정치 문법과 구조에 저항”하면서 큰다.

이정희의 노무현 1주기 추도사에는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당파성은 없다.

당신이 떠나신지 1년입니다. 당신을 잃은 눈물, 보셨나요. 당신을 그리는 가슴들, 느끼셨나요. 당신의 국민이어서 행복했다는 말, 들으셨나요.

당신은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 놓고도,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저들이 아닙니까.

떠나신 당신 앞에서 우리 스스로 뉘우치겠습니다. 우리 힘이 아직 충분히 크지 않은데, 있는 힘도 합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칼을 휘두를 때, 우리는 아직 내 앞에 칼날이 오지 않았다고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우리 안에 남은 질긴 욕망의 끈을 끊겠습니다. 역사의 후퇴 앞에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 앞에서, 손톱만 한 욕심이라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말 잔치는 거두어버리겠습니다. 때로 외로웠던 당신의 발걸음이 결국 전진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두려움도 지워버리겠습니다. 절벽에 몸을 던진 당신 앞에서, 그 어떤 변명 뒤에 숨을 수 있겠습니까. 생활의 무게도 내려놓겠습니다. 주저하면서 역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함께 손을 잡겠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짓밟는 저들 앞에서 우리의 손을 놓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앙금도 지금은 뒤로 미루어두겠습니다. 낯설음도 접어두겠습니다. 힘을 합치기 위해 더 많이 내어놓는 결단과 이기기 위해 더 많이 땀 흘리는 아름다움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들 속에 진보의 뿌리를 내리고 자양분을 빨아올리겠습니다.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꽃피우겠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루어내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7.

노무현의 사람들은 제2 노무현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뒤에서 밀어주어야 한다. 노무현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케 하는데 족해야 한다.

막연한 느낌으로만 알고 있는 노무현의 정신이 사실은 여기저기 뿌리내렸고 살아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확인시켜야 된다. 그렇게 하여, 제2, 제3의 노무현이 계속 나올 것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

노무현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그것을 시대의 확고한 방향성으로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정희가 노무현 닮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이기명 선생을 비롯한 노무현을 잘 알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이건 의미심장하다!

8.

한 가지 걸러낼 게 있다.

솔트씨가 말한 3% 진보연들이 견제를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세습 문제를 계기로 이웃한 진보를 물어 늘어질 찬스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표적인 게 이대근이고 진보신당류다. 저들이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북한세습 때문이 아니다. 그건 핑계다. 진보의 헤게모니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의 최종 공격 목표가 또다시 노무현(여기서는 제2의)으로 귀착될 거라고 본다.

하는 꼴을 볼라치면, 진보연들은 자기들만이 고고한 진보여야 하므로 ‘야, 뭉쳐’의 부름에도 이정희도 노무현 정신이 살아나는 것에도 (자기들이 주도하지 않는 경우) 정권을 되찾아보자는 대중적 열의도 모두 생깔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잘됐다. 2012년으로 가는 과정을 그 가짜 진보들을 확실히 걸러내는, 영원한 3%로 고사시키는, 수구적 정체를 까발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는 거다.

이정희는 지금 치고 나가야 한다. 할 일은 명확하다. 지금 바깥쪽에서 문성근이 하는 일을 안쪽에서 하면 된다.

안팎에서 이렇게 이니셔티브를 갖고 움직이면, 그동안 우아한 진보 말빨로 수구적 정체를 숨겨왔던 진보연들이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때 그들을 걸러내고 전선을 분명히 하면 된다.

9.

이정희를 통해 큰 그림을 그려보자. 안팎으로 민란을 일으켜 현재의 판에 안주하는 자를 압박하고 가짜들을 걸러내자. 시니컬한 부동층과 젊은 축을 끌어내자.

지금 이명박에 제대로 따지고 있는 자 누구인가? 가짜진보들 그리고 찌라시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누구인가? 열정적으로 비판하되 냉정하게 대안 내놓는 자 누구인가?

천안함의 진실을 끝내 밝혀내고 4대강 삽질을 끝까지 막아낼 의지, 누가 가진 것으로 보이는가?

지금 우리가 보는 있는 이정희는 그의 일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2년 후의 그가 얼마만큼 나아갈 있을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10.

찬가를 쓰는 김에 그에게 별명 하나 지어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스페인 내전에서 젊고 매력적인 공화국 그러나 아직은 미숙했던 그 공화국을 위해서 싸운 여성 정치인이 있었다. 거의 유일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돌로레스 고메스 또는 “열정의 꽃”,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가 외친다.

프랑코가 마드리드를 포위했을 때, “어느 놈도 지나갈 수 없다(no pasaran!).” 자원해서 그것도 가장 용감히 싸운 국제여단이 해산 직전 바르셀로나를 행진할 때, “고개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대 영웅들이여!”

프랑코는 1976년 죽었다. 라 파시오나리아는 끝까지 살아남아 스페인에 민주주의의 꽃이 다시 피는 걸 지켜봤다.

여리지만 결코 꺾이지 않을 꽃, 꺼져가는 민주주의와 사람 사는 세상을 끝내 되살릴 미션을 가진 이정희의 별명 어떤가? 열정의 꽃

11.

경향신문이 드라마 <대물>까지 들먹이며 여성 대세론의 주인공으로 박그네를 한껏 냄새 풍긴 그 기사에서 기억해 둘 문장을 발견했다.

“극 중 서혜림 대통령은 낡은 방식의 정치 문법과 구조에 저항하며 서민들의 처지와 어려움을 헤아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같은 모습은 현존하는 대부분의 정치권 인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드라마 평론가 김원 인용)”

경향신문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왜 박그네만 떠올리고 이정희는 생각해내지 못한 걸까? 기사를 읽으면서, 신문과 달리 필자는 이정희가 퍼뜩 떠올랐다.

 

초모룽마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0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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