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탐사기

김제영의 이란 페르시아 문화답사 (9)

순수한 남자 2010. 11. 14. 18:16

김제영의 이란 페르시아 문화답사 (9)
번호 212083  글쓴이 김제영  조회 933  누리 71 (71-0, 2:11:0)  등록일 2010-11-7 18:45
대문 5


김제영의 이란 페르시아 문화답사 (9)
SAFAVID왕조의 ABBAS대왕이 건설한 ESFAHAN

(서프라이즈 / 김제영 / 2010-11-07)


아무리 찾아도 없던 일정표(메모도 한)를 뒤늦게 등잔 밑에서 찾아냈다. 8회분에서 소개했어야 답사의 순서가 맞는데 두미가 얽히고 말았다. 메나루존반(흔들리는 탈)의 다음 코스는 타일세공으로도 관광명소의 한몫을 하고 있는 이맘 모스크가 아니었고 아르메니아인 지구였다. 기원전 Darius 1세가 쉬라즈(시라즈)에 아케메니언 왕조의 수도 PERSEPOLIS를 건설했듯 인류 역사에서 잔학의 표본으로 꼽을 수 있는 사파위(Safavid)왕조의 압바스(Abbas 1588-1629)대왕은 유네스코가 보존하고 있는 인류문화의 보고 Esfahan을 건설했다. 군사력을 키우고 도시를 기능적이고도 화려하게 창출해냄으로써 사파위 왕조(1501-1722)를 꽃피운 압바스 대왕은 이란의 경제 전략에도 뛰어난 실로 총체적 지도력을 발휘한 통치자였다. 그가 이란 무역의 길을 트기 위해 지략의 시선을 박은 곳이 국경 지인 아르메니아의 줄파 (Julfa)도시였다. 당시 줄파는 세계의 비단 장사들이 오가는 국제무역의 중심 무대였다. 아르메니아인이 주체인 줄파의 종교는 기독교이다. 압바스는 그곳의 그리스도교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이스파한에 아르메니아 타운을 형성 국제무역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니까 이슬람 국가에 허용된 기독교 지구인 것이다. 여행객에게까지 머리를 가리라고 간섭을 하는 철통같이 엄한 규율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의상은 그들 임의대로란다.

그래서였는지 아르메니아 지구에 가까워지자 차도르를 걸치지 않은 여인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뜨인다. 그러니까 이란 내에서 전신을 검은 포로 감고 얼굴만 빠끔히 내놓은 여인들 중에서 그런 차림이 아닌 여인은 아르메니아 특수지역의 기독교 신앙여인으로 판단하면 틀림이 없다. 자유라고는 했지만 종교의 자유일 뿐 이슬람 시민의 입주가 금해져 있듯 그들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이슬람 시민들과 어울려 살 수 없다. 아르메니아 지구의 이탈을 통제하고 있다.

뉴줄파의 거리는 Julfa에서 이주한 New JuIfa를 의미하고 반크 교회는 뉴베드로 교회를 뜻하는 게 아닌지(메모가 불분명) 교회건물은 1605-1655에 건립이 되었고 구텐베르크에서 제작된 세계 최초의 성경책, Rembrandt의 아브라함(17세기), 그레고리 성자가 고문 박해받는 장면의 회화, 17세기 Flemish 십자가, ARARAT상(1933), Embroidery Made India(18C) 등 기독교문화의 문헌, 미술품 도구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한 때 이슬람 왕을 개종시켜 13개 교단을 수용한 이곳은 기독교 박물관을 겸하고 있고 이곳에는 기독교 대성직자만이 거주할 수 있단다. 터키군 침공 당시 처형당한 20명의 순교자 무덤도 이곳에 있단다. 이곳을 나오면서 아르메니아인과 홀랜드 그리고 이란과는 무슨 관계일까 숙제로 담고 왔다. 의외로 Dutch미술이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Arch of Shah-e Cheragh's Mausoleum은 40개의 기둥과 인도의 타지마할과 비슷한 규격의 풀, 꽃과 숲이 어우러진 공원 건물이다. 기둥에는 못이 전혀 사용되어 있지 않고 우리나라의 경우도 유럽도 대개 기둥은 둥글게 되어 있는데 이곳은 6각이든가 8각이든가로 되어 있고 기둥 안에는 철근이 들어 있단다. 40이라는 숫자는 모하메드가 기도를 한 40일과 연관이 지어진 종교적 의미가 시사되어 있을 것이란다. 재미있는 것은 건물의 실재 기둥은 20개이고 물에 비친 20개의 그림자 기둥을 포함해서 40이라는 숫자가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외국의 사신들과의 외교 만찬장이었고 침공군을 격퇴하고 승전한 군주(왕)들을 환호하는 연회장이었단다. 휘황하게 밝혀진 불빛이 흔들리는 물에 비쳐진 20개의 물그림자 기둥과 20개의 지상의 기둥을 상상해보니 20개를 40개로 불린 그들의 동화적 미의식에 미소가 지어진다. 팔레비 왕의 딸이 이탈리아에 유학을 했는지 그녀가 이태리의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40개 기둥의 모슬렘을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단다. 왕이 이곳으로 행차할 때는 건너편 건물에서 풀을 지나서 이곳 연회장으로 입장했단다. 목재의 모자이크는 정교했고 대리석 벽에 천연염료와 돌가루 접착제로 전쟁 영웅을 묘사한 페르시안 민속의 세밀화도 볼만했다. 왕자들의 놀이공간 파라다이스 정원은 시민의 공원으로 개방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다음은 이스파한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배화신전 터이다. 이슬람 이전의 이란의 종교는 배화교(拜火敎)즉 조로아스타교라고 해도 그리 어긋난 설명은 아닐 것이다. 사산조(B.C 224 -651)의 아루다시루의 선조는 배화교(拜火敎)신전의 사제였으니 사산조 시대에 조로아스터교가 크게 번창하였음은 자연현상이었다. 당시의 조로아스타교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에 대한 예배와 동격으로 불을 신성시하는 예배를 헬레니즘 시대와 그 이후의 세계에 번진 여러 형태의 종교의식과 동일하게 집전했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성직자와 동일한 양식의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산조 시대의 종교적 신앙은 빛의 선신(봄챈)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마의 신 아하리만과의 싸움이라는 견해의 믿음이 중심 사상이었고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천사와 신은 아후라 마즈다와 주종의 관계라고 간주를 했다.

배화교의 신전은 풀 한포기 없는 석회암 산꼭대기에 있었다. 까마득한 산 정상까지 도저히 올라갈 자신이 없어 처지고 말았다. 그러지 않아도 조마조마했던 천식기가 도지어 도저히 경사진 곳을 무리하게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흙집에 제단이 있고 촛불이 타고 있었단다.

배화교 출범이래 점화된 불이 한 번도 꺼지지 않고 오늘까지 타고 있다는데 이 언덕의 불인지 배화교 신전의 다른 곳을 말하는 것인지 메모가 되어있지 않다. 이란을 여행하게 될 분은 그 신비한 성화의 생명의 시간을 확인해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사산조 시대의 장례양식은 시신을 높은 산에 올려다 놓았단다. 더렵혀진 육신으로 대지가 물들어서는 아니 된다는 엄한 계율 때문이란다. 그래서 시신은 새나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일명 조장(鳥藏)이라고 한단다. 일설에 의하면 시신을 산꼭대기에 운구함은 하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숨겨져 있단다.

8회분에서 쓰지 못했던 호텔 명칭은 Kowsar이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 후 희망자에 한해 밤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무대공연 관람이다. 우리의 안내양 이정자 양과 현지 가이드가 프런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밤나들이에도 보자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이 생생한 것은 외국에서의 공연 관람이기에 모두가 들떠 있었고 몸치장에도 꽤 신경을 썼고 그래서 공연시간에 맞춰 가기가 아슬아슬했다는 점이다. 기왕이면 늦지 않고 처음부터 관람하고 싶었다. 공연 도중에는 입장이 허용되지 않는 매너가 있기에 나는 초조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가자고 재촉을 했다. 막을 올릴 시간인데도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거리가 얼마나 되나요?"
"여기에서 약 15분 정도 걸립니다."

'옆집이라도 늦겠어요. 자동차로 15분이면 다 끝난 담에 가겠어요."
"괜찮습니다. 염려 마십쇼"

염려 말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비싼 입장료 내고 절반밖에 못 보게 생겼는데도 현지 가이드는 무사태평으로 누군가하고 전화통화만 하고 있다.(이란에서 핸드폰 사용은 이 가이드에서뿐이었다.) 한국의 이정자 양에게 재촉하라고 닦달하다시피 했지만 무슨 사정인지 행동이 소걸음이다. 호텔 로비에서 푹 뜸을 들인 일행이 차에 오른 시각은 공연시간이 꽤 지나서였는데 가이드와 운전사가 잠깐 들릴 데가 있단다. 열통이 터져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태권도 공연장입니다. "

"태권도요?"
"이란의 태권도입니다. "

'태권도가 됐건 무슨 도가 됐건 기왕 구경을 하려면 처음부터 관람해야지요."
"염려 마십쇼."

또 그 ‘염려 마십쇼’다. 들릴 곳 들려 운전사와 가이드가 볼일 다 보고 공연장에 당도한 시간은 예정의 공연시간에서 30분이 지나 있었다. 내가 뛰다시피 숨을 헉헉거리며 서둘자 현지 가이드가 괜찮으니 뛰지 말란다. 공연 도중에 들여보내주는 것만도 고마워 고양이 걸음으로 들어선다. 이게 웬일인가 우리가 좌석(긴 나무의자였는지 경사가 제법 있었으니까 시멘트 바닥이 아니었을까?)에 앉자마자 공연을 시작하겠단다.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고 가이드는 그러한 내용을 협의하기 위해 긴 통화를 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오두방정을 떨었으니‥‥ 먼저 와 왜 공연시간을 어기느냐고 항의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 준 유럽인지 미국인지의 관람객이 어찌나 미안하고 고맙던지‥‥ 이란처럼 외침과 전쟁과 내란이 극심하고 빈발했던 나라가 또 있을까. 그들의 태권도는 우리의 것과 전혀 상이했다.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비정규 민간인의 특수 훈련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들의 도구는 이제까지 구경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크기와 무게의 배트방망이, 철퇴, 양동 이 등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 출현한 영웅들 아니면 맨주먹으로 일어선 동학 혁명군의 죽창의 의지를 상징하는 도구들 같다고 할까. 타악기(북)의 원시적 리듬과 추임새에 따른 마치 거인의 동작을 방불케 하는 그들의 묘기는 진기했다. 예술도 스포츠도 한 민족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환경의 소산임을 말해주고 있음이다. 이란의 소극장은 70년대 연극 연출가 방태수가 퇴계로에 세운 창고극장과 김수근이 원서동에 세운 공간극장을 혼합한 분위기였다고 할까. 돌아올 때는 느긋하고 흐뭇했다. 

 

김제영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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